적기만은 부산시 남구 우암동과 감만동의 부두근처라고 한다.
적기뱃머리라고 하기도 하고
효자동 이발사 이야기 저 자 ; 이 성재
송강호 주연의 영화 “효자동 이발사”의 박수웅씨는 실제 인물이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을 16년 5개월 동안 아주 성실하게 모셨던 분이다. 그는 영화에서처럼 희극적인 사람이 아니고 아주 진지한 인생을 산 사람이다. 오랫동안 청와대에서 생활하다 보니 자연 청와대 분위기를 닮아 갈 수 밖에 없었나 보다. 여느 사람들이 각자 자기 직장이나 주변 분위기를 닮는 것과 마찬가지이리라. 박씨는 현재 부산에서 일제 시대의 일본군이 숨겼다는 금괴와 보물을 발굴한다고 가산을 다 탕진하고도 아직 미련을 버리지 않고 이에 매달리고 있다고 한다. 오늘은 이 박씨에 관한 이야기이다.
박 대통령의 최 지근거리에서 이발을 한다면 보통 신임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여담으로 박 대통령은 면도칼이 무서운 게 아니라 얼굴 피부가 약해서 전기면도기만 사용 하였다고 한다.) 1975년경 그러한 박씨에게 공군 대령 출신인 김성태(1977년 작고)씨와 부산 동아대학의 지질학과 구준택(1984년 작고)교수가 친지의 소개로 찾아 왔다. 그들은 낡은 종이에 펜으로 그린 부산 적기(赤崎), 지금 부산시 남구 문헌 4동 1210번지 일대의 보물 매장도를 내놓으면서 매장물 발굴허가를 받아 달라는 것이었다. 김성태씨가 일본군 공군대위로 근무 할 당시 노구찌 이찌나까(野口一長)란 일본군 중위로부터 받은 적기 일대의 일본군 지하기지에 묻혀있다는 보물의 위치도 였던 것이다. 또 하나의 지도는 당시 적기 만에 주둔한 일본군 제122 독고부대 사령관으로부터 받았다는 4장의 비밀지도와 배치도에는 금괴 수백 톤, 금동불상 36개, 비취불상 1개, 다이아몬드1천6백개, 은 150톤등이라고 기재되어 있는 비록 허술하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그럴듯해 보이는 매장물 지도였다.
이들이 주장하는 매장지는 당시 군수기지 사령부로 아무에게나 발굴허가를 내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박씨의 생각으로는 발굴비용이야 허가 요청자가 부담하는 것이고 만에 하나 보물이 나온다면 그것은 국가적으로 엄청난 이익이 틀림없으므로 박 대통령에게 이발하는 틈을 타서 직보 하였다. 박 대통령 역시 5.16혁명 전 군수기지사령관을 지냈으므로 그 곳 지리를 소상히 아는 터였다. 그래서 그런지 국방부로부터 발굴허가를 얻게 된다. 결국 이 일로 효자동 이발사 박씨는 보물 발굴에 관여하게 되었다. 그 후 김성태씨와 구준택씨가 사망하고 박씨는 박 대톨령 서거 후 정충재라는 사람과 손잡고 아예 발굴 작업에 가산을 탕진하며 평생을 이 일에 매달리게 된다.
지난 82년 1월에는 정씨가 작업을 시작해서 83년 9월 지하 10m쯤에서 잠수함 기지 통로나 입구로 보이는 지점을 발견했으나 발굴 허가기간이 다 되어 작업을 중단하게 되었다. 이 밖에도 잠수부를 동원해서 노다지를 찾고자 이 일대 바다 밑을 뒤지기도 하였다고 한다. 어느 땐가 우암로 도로확장 공사 중에 이 일대에서 방공호 비슷한 대형 인공터널 3개가 발견되어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도 하였다. 이 발굴 작업은 현재 여러 사람들이 진행 하고 있는데 관여 하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제대로 진척이 안 되고 있다고 한다.
부산 일대에 일본군의 약탈 보물이 있다는 이야기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일본군이 패망하기 직전 1945년도에 일본군들은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 각국에서 금괴를 비롯한 보물을 적극적으로 약탈하기 시작했고 이 약탈한 보물을 잠수함 26척을 동원해 일본본토로 운송하기 시작한다. 약탈의 주동자는 야마시다라는 장군이었고 히로이토 천황의 동생인 치치부 왕자가 이 작전의 총 책임자이다. 이때 일본 본토를 미군이 해상봉쇄하자 일부는 필리핀에 또 일부는 부산의 지하 기지에 숨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땅에 대한 독특한 이력이다. 해당부지의 토지 대장을 보면 1939년 4월에 조선인 땅이던 것이 일본 도쿄의 한 일본인에게 넘어가고 같은 해 9월 일본목재공업주식회사의 명의로 된다. 치치부 왕자가 보물을 숨기기 시작한 후 소위 황금백합작전을 개시하는 1945년 7월 3일 조선총독부로 소유권이 넘어간다. 이것은 지하가 어찌되었던 지상은 불모지나 다름없었는데 조선총독부로 소유가 넘어간 것은 지하 매설물이 중요하다는 방증일 것으로 추측된다.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가족협회와 일제 강제연행 생존자협회에서 광복직전인 1945년 5월 부산 문현동에 조선인 노무자 천여 명이 학살되어 매장되었다고 하는 주장은 결코 허튼 얘기가 아닐 것이다. 아무튼 이 지하기지가 잠수함기지 또는 어뢰창고라는 주장이 끊임없는 것으로 보면 틀림없이 지하 동굴이 있는 것이 사실인 것 같다.
만일에 보물이 없는 잠수함 기지라 할지라도 우리의 선조 천여 명이 눈을 못 감고 그 곳에 묻혀있다는 있다는 사실이 증명된다면 보물 발굴 못지않은 중요한 사건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그 분들의 원한이 밝혀지고 일본군의 만행이 백일하에 드러난다면 그 또한 우리 후손들이 반드시 밝혀야 할 의무가 아니겠는가? 효자동 이발사로 인해서 지금가지 숱한 사람들이 가산을 탕진하고 패가망신 하였다지만 적어도 우리 조선인 노무자의 한은 풀어주었으면 좋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효자동 이발사 박씨에 얽힌 보물 이야기는 이 부산 이야기 말고도 서울 초동 극장과 창덕궁에 묻혀있다는 고종 황제의 금괴 이야기, 부산의 해저 전선 이야기 등등 많이 있는데 다음기회에 하기로 한다.
출처는 http://www.oneclick.or.kr/contents/nativecult/area09.jsp?cid=76500
◆일제 지하 해군기지
부산 적기만 해저에 은닉된 수 조원대의 보물.(비밀통로발견)
부산 토박이 치고 이 '금노다지 비밀창고'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 1980년대 초 노다지 꿈에 부
풀어 패가망신한 숱한 후일담은 술자리마다 바닥나지 않는 안주감이었다.
전설 같은 보물 동굴의 이야기 보따리가 풀리기 시작한 것은 2차 대전 종전 무렵.
36년 동안 조선을 침탈 통치해온 일본군은 2차대전 당시 부산 남구 용호동과, 우암동, 감만동 일
대의 세칭 적기만에 해저 잠수함 기지를 건설했다.
대동아 전쟁 막바지 한국 아카사키(赤崎)만에 주둔한 일본군 독고부대는 군비자금용으로 한국과
중국 등지에서 강탈한 수조 원대의 금붙이를 미처 일본으로 빼돌리지 못하고 적기만 해저 잠수함
도크와 어뢰공장, 화약공장과 군수물 창고 속에 매몰시켜둔 채 퇴각했다.
당시 독고부대가 파묻은 노다지는 금괴 수백톤과 금동불상 36좌, 은 350톤, 비취불상 1좌, 다이아
몬드 1천6백 개, 수은, 텅스텐, 니켈 2백 상자와 각종 패물. 독고부대 사령관은 기지 내부도와 배
치도 등 보물을 수장한 4장의 비밀지도 만을 갖고 일본으로 쫓겨갔다.
1971년 3월 부산 남구 우암동 도로 확장 공사 중 3개의 대형 인공 터널이발견됐다. 부산시사(史)
에는 일제가 영주동 야산을 허물어 부산항과 중앙동 일대를 매립하고 지금의 4, 5부두 쪽은 우암
동 산을 깎아 매립했다고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해방 직후 적기만(지금의 감만동과 우암동 일원) 인근에서 엄청난폭발과 함께 대형 화재
가 발생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28년을 전후해서 적기만에서 용도가 알려지지 않은 지하 공사와 대규모매립 공사가 벌어졌고 이
때 영도에는 지상 군수물자 공장이 들어섰다.
그런데 이때 그 맞은 편엔 해저 잠수함기지가 건설됐으며 공장과 기지를연결하는 부산항 바다 밑
해저 터널도 건설됐을 것이라는 소문이 발굴업자들 사이 떠돌기 시작했다.
그런데 60년대 말 해저 잠수함기지의 실체를 증명할 만한 보물 지도를 들고 한 사람이 등장한다.
일제 때 일본항공대를 나와 일본군 장교로 근무하다 잠수함기지 사령관의 여동생과 결혼해 귀국
한 뒤 육군 장교 생활을 했다는 김승택 씨다.
그는 일본서 귀국할 때 당시 일본인 처남으로부터 해저 비밀기지 배치도를 입수했고 군 예편 뒤
보물찾기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내 보물을 찾지 못하고 패가망신, 70년대 중반 죽고 만
다.
모두 넉 장으로 세밀하게 그려져 신빙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됐던 이 지도는 다시 정찬영 씨(60)에
게 전해진다. 정 씨는 잠수함기지 건설 부역에 동원됐다가 탈출했다는 중국인을 만난 뒤 귀국해
김 씨와 함께 발굴 작업에참여했던 정구완 씨(81년 사망)의 아들로 알려진 인물.
그가 아버지와 함께 발굴 작업을 해오던 중 79년 마침내 용호동에서 높이3~4m, 길이 400m의 수중
통로를 발견한다. 그리고 82년에는 군(軍)이 정씨에게 정식 발굴 허가를 내주면서 그의 탐사는 활
기를 띠게 된다.
정 씨의 지도는 당시 적기만에 주둔했던 일본군 제112독고부대 다카시마사령관이 만든 것으로 전
해진다. 일본어로 씌어진 이 지도에는 정밀 기계창고ㆍ공장 기계 창고ㆍ탄약고등 주요 시설과 함
께 비취 불상 1좌ㆍ금좌불상 36좌ㆍ금봉 56톤ㆍ공업용 다이어몬드 1, 600개 등 보관 물품들이 꼼
꼼하게 적혀 있다는 것.
그리고 82년 민ㆍ군 합동 발굴팀은 감만동 육군 00부대 영내에서 진행된발굴 과정에서 잠수함기
지 지하 출입구를 발견하는 개가를 올린다. 당시발굴팀은 지하 10여m 지점에 철판과 콘크리트 인
공 구조물과 함께 용호동쪽 수중 통로와 해저의 철도 레일과 어뢰 1정을 찾아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이 발굴 작업은 군 활동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수있다는 석연찮은 이유로
중단됐고 그 자리는 다시 메워진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최근까지 자신이 발굴한 지하 출입구 인근 모래무지에 살고 있었던 정 씨를 찾았을 때 그가 사는
사글세 단칸방은 비워져 있고 그에게 오는 우편물들만 잔뜩 쌓여 있었다. “벌써 6개월째 소식이
없어요. 평생을 매달린 일인데 화병까지 얻었었지요”라는 게 주인 할머니의 염려였다
[ 대표적인 예가 적기만(지금의 부산 감만동과 우암동 일원) 보물탐사 작업 중단 사건이다.
80년대 초반 정찬영씨는 각고의 노력 끝에 보물이 매장된 장소를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보
물을 눈앞에 두고 그는 발굴 작업을 중단해야 했다. 함께 발굴 작업을 벌이던 군 당국이 군 활동
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는 석연찮은 이유로 작업 중단을 지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파냈던 그 자리는 다시 메워졌다. 발굴허가를 내준 군이 왜 돌연 허가를 취소했는지 정확
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정씨는 이후 화병을 얻어 행방을 감췄다.
당시 이 보물이 정치권의 권력자에게 넘어갔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도는가 하면 군 당국이 독식했
다는 소문도 무성했다.
부산 남구 문현동 1219 지하 16m 지점에서 발견된 인공동굴 변조의혹도 풀리지 않고 있다. 최초
발견자 정충제씨는 백준흠, 김성태, 채상훈씨 등이 막대한 보물을 몰래 빼돌리기 위해 그랬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백씨를 비롯한 3명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다. 이들 3명 외에 동굴 안에 무엇
이 있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2003년 2월13일 YTN에서 굴의 조작 가능성을 제기했다. 전문가들도 이 굴이 변조됐을 가능성이 크
다고 지적했다. 그 이후에는 굴에서 반출된 것으로 보이는 금덩이를 본 목격자들도 나타났다. 이
의혹은 아직 해소되지 않은 채 허공에 떠있는 상태다.
...
...
...
엄.. 어엄. 엄. 저 글만 보아선 군부대가 꿀꺽했을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덜덜